Sosaengpo Waesung/wajo


| 西生浦倭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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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쫒긴 왜군은 축성과 양식 확보의 계획을 세웠는데, 남해안의 중요 지점을 기점으로 해서 한강 이남의 4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선조 26년(1593)에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서생포 사이에 30개의 왜성을 쌓았다. 서생포왜성은 부산왜성에 이어 3번째로 지은 석성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수송이 용이하여 전쟁기간동안 왜군의 중요거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서생포왜성은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1593)에 완성한 것으로 그 내부가 45,960평에 달하는 거대한 석성이다. 본환(本換)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다시 성벽으로 둘러쳐지고 네모진 마당이 있다. 가등청정(가토오 기요마사)가 본부로 삼고 조선의 점령을 꿈꾸던 곳이다. 북쪽과 서쪽으로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장군수라는 우물 흔적도 있다. 장군이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이라는 누각도 있다고 전해진다. 성안은 네모지만 성벽이 둘러쳐진 모양은 마치 미로처럼 보인다. 승리를 나타내는 승(勝)자의 옛 전자를 묘사하여 쌓은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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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석축 성벽만 남아 있지만 비교적 완연하며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이다. 이 성은 기장왜성과 임랑포왜성,자성대왜성,동래왜성 및 울산왜성(학성)과 봉화로 서로 신호연락하였다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이름한다. 성터에는 당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신 애국지사를 모신 창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 왜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31년(1598) 명나라 마귀제독(麻貴提督)이 정유재란때 왜군을 대파하고 탈환했다. 기록으로는 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고을 찾아와 가등청정(카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왜군의 어처구니 없는 제안으로 결렬되었고 마침내 명나라 마귀제독의 도움으로 서생왜성을 탈활한 것이다. 서생포왜성은 임진란때 왜군이 가장 오래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왜성이기도 했다. " 장군수와 천수각(天守閣)이 있는 내성" 현재 내성에는 장군수와 천수각이 있다. 그리고 북문과 서문도 이곳에 있다. 장군수는 옛날에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군 장수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 성벽이 무너지면서 샘터 위로 돌들이 많이 덮여 우물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 ||||||
![]() | 천수각(天守閣)은 이 왜성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평소에는 왜장이 머물고 전쟁 때는 전망대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데 천수각의 건물과 흔적은 없지만 돌계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이곳에서 사방을 보면 산이 있는 서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트여있어 아주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문(西門)은 왜성 전체로 보면 남쪽 방향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문을 나서면 해안으로 갈 수 있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문 역시 지금은 돌이 무너져 문의 형태만 있을 뿐이다. 기록을 보면 이 왜성에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오직 서문만 살아 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이 지역이 서생면이 된 것도 이 문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북문(北門)은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북문은 천수각 바로 위에 있다. 그런데 이문은 문의 이름만 있지 실제로 문은 없다. 따라서 옛날에 이 왜성에 들어왔던 적병 중 이곳이 문인 줄 알고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해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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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문 아래에는 성의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하수구(下水溝)를 만들어 놓고 있어 일본인들이 왜성 쌓기에 들인 공을 엿볼 수 있다. " 3만평에 달하는 외성(外城) " 외성에는 현재 전답이 많고 또 주민들도 많이 살고 있다. 현재 성 전체 넓이가 4만5천여평이 괴는데 이중 외성이 차지하는 넓이는 3만평 정도가 된다. 이 면적을 소유자별로 보면 사유지가 1백47필지 그리고 국유지가 11필지로 모두 1백58필지이다. 현대 이곳에는 42가구가 있다. 외성에는 우물과 창표당이 있다. 우물은 농기계 보관 창고 바로 곁에 있고 지금도 물이 많이 고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이 너무 깨끗하고 맛이 좋아 광천수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지역에 인가가 많이 들어서고 또 이 마을에 상수도가 설치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대신 인성사 인근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마시고 있다. 대신 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인근 농작물을 키우는데 이용되고 있다. 창표당은 이 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를 한 우리 장병들을 위해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2년(1599)에 세운 사당이다. 창건 당시 창표당에는 위패를 안치한 본당 들 건물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배 밭에 울산군에서 세워 놓은 표지판만 있다. 왜군은 조.명연합군에 패배하여 퇴각하면서 조선인 서생포왜성의 축성자를 일본으로 포로로 데리고 갔고, 현재 일본에서 유명한 구마모토성을 석축하는데 동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후손들이 구마모또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서생포 왜성을 방문하였다. 그들의 성씨는 서생이라고 한다. | ||||||
Sources:
http://www.natsukusa.com/map-sesaengpo.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