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 (Palhae) -South (Silla) Kingdom period

Publié le par Tiger LEE

924년 요의 요주를 공격하여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거란인을 약탈하니 발해와 요는 이제 본격적인 전면전만 남겨두었다.무려,20년 가까이 전쟁을 한 것이다.그리고 그 결과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하였다. 925년 12월 요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이른바 두 가지 일중 하나는 이미 끝냈지만 발해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로서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안주할 수 있! 겠는가!" 라는 조서를 내리고 거란군과 기타 원정군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한다.첫 공격지는 발해의 요충지였던 부여성이었다. 발해국이 강성할시에는 거란에 대비하여 많은 군대가 주둔하였지만,요나라가 공격할 시에는 성의 수비가 약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주요 부대는 서쪽의 장령부에서 요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여성은 3일 동안 요의 대군을 맞아 고립된 성을 사수하지만,끝내 요의 대군에 버티지 못하고 성주 이하 전체 병사들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부여성의 함락은 곧 발해국의 멸망과 연결되었다. 요의 대군은 부여성에서 수도 상경용천부까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다.부여성 함락후 6일 뒤에야 발해군이 나타났다.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 발해군은 요의 안단이 이끄는 선봉 1만군과 상경용천부 근처에서 교전하지만,요군은 발해군을 괴멸시키고 수도를 포위하였다. 발해 수도에 있던 군민들은 근처의 지원 없이 요군과 교전하지만,3일 후 발해 왕 대인선은 신하 300여명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이에 요군은 근시 강말달등 13명을 보내 성안의 무기를 수색하였다. 하지만 발해 병사들이 이들을 살해해 버리고! ,발해국왕 대인선도 다시 요군과 항전한다고 포고하니 요의 대군은 즉시 공격하여 다음날 드디어 성을 함락시켰다. 함락과 동시에 왕과 귀족들은 요군에 투항하니 발해국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지금까지 발해 멸망은 이원적 민족 구성에 의한 한계 및 정치.경제적인 혼란으로 인한 통치 계급의 모순,방위력 한계 등으로 발해는 요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멸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발해 후반기 25여년을 재검토해 보면서,발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김은국 교수님은 발해 대인수 시기를 좀 더 세분화하여 900년대 초부터 918년까지를 발해와 거란의 충돌기, 그리고 919년부터 925년까지 거란에 의한 발해 압박기,멸망기는 925년 말부터 이듬해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왕계 단절이 되는 시기로 설정하고 있다.발해와 요의 전쟁은 무려 20여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 요동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비록 발해는 요동지역을 상실했지만,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국가였다.그것은 919년 요의 침입에,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 ?시킨 후,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하다는 것이다. 당시 국제적 환경은 중국 지역이 5호10국시대,한반도 남부 지역은 후삼국으로 분열이 된 혼란기였다 이런 가운데 15대 인선왕은 군사적인 대응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적절히 요를 견제 하였는데,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어 요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요사 본기에 '이심'이라는 표현대로,924년 여름을 기점으로 하여 발해에 내부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추측 된다.그것은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이 장군 등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귀화한 것이다. 이것은 발해 내부에 또 다시 정치 투쟁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 된다.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나라는 20여년간의 전쟁 경험을 통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한 것이다.즉,대규모 기습 작전을 통한 '수도 함락'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중앙 정부는, 요군이 서쪽으로 공격할 것을 예상해서 요동 지역과 인접한 장령부에 대규모 부대를 파견했을 것이며,북쪽에는 요충지인 부여성이 건재 하기에 요군의 대부대가 아닌 이상에는 점령하기 힘들 것라고 판단 했을 것이다. 발해 멸망 후,장령부! 가 6개월간 단독으로 전투를 한 것은 발해의 대부대가 상주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그러나 요군은 10만명의 병력에다 5만의 병력을 출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요군의 기습에 부여성은 3일간이나 버티지만, 대공세에 함락 되었다. 당시 요사에도 부여성의 전투에..." 힘을 다하여 부여성을 함락시켰으나,몸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어 태조(야율아보기)가 친히 그를 위해 약을 지었다.." 라는 기록은 부여성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여성 함락 후,요군은 바로 상경용천부로 진격해서 수도를 공격하였다. 상경용천부를 방어하는 3만 발해군이 10만 요군과 접전을 했지만 우수한 기동력의 기병에 비해,수도 방어를 위해 대다수 보병으로 구성 되어진 병력으로 접전하기는 열세였으며,3만 발해군이 무너지고 수도는 바로 요군에 함락된 것이다.부여성 함락 후 6일만에 상경용천부가 포위되고 요군에 항복한 상황에서, 주변의 발해군은 미처 도움을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수도는 함락되어 왕조는 단절되었지만,다행히 발해 세자 대광현은 탈출하여 인선왕을 대신하여 발해군을 지휘 했다고 본다.장령부 지역의 ! 발해군은 6개월간 요군과 전투를 하였으며,중앙 정부가 무너진 상태에서 전투를 벌렸다는 것은 그 의의가 크다.

http://my.dreamwiz.com/bsw7509/bsw/re48.htm

http://myhome.naver.com/godaesa/balhae/gaegwan2.htm

 

 http://www.historia.co.kr/spboard/board.cgi?id=pds&page=9&action=view&number=165.cgi&simple=yes

http://bbs.hani.co.kr/Board/ns_asia/Contents.asp?STable=ns_asia&RNo=250&Search=&Text=&GoToPage=3&Idx=444&Sorting=1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발해국의 멸망
당시 당나라는 이미 907년 절도사 주전충의 후량으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이 후량은 또 923년에 절도사 이존욱의 후당으로 인하여 멸망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발해는 서쪽의 중국으로부터 어떤 압력도 받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신라는 9세기 이래 줄곧 쇠퇴의 일로를 밟고 있었으며 9세기 말의 큰 농민폭동에 뒤이어 10세기초에는 후삼국으로 분립되면서 국토의 남부는 여러 개의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러한 정세에서 발해는 역시 남부로부터도 그 어떤 압력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발해의 서쪽에 이웃해 있던 거란이 급속히 강화되면서 대외침략을 도모하였으니 당시 극도로 안일하고 나약해지고 있었던 발해의 통치계급들에게는 거란 침략세력의 대두가 커다란 위협으로 나타났다.
거란 사람들은 7세기 말 이진충·손만영 등의 지휘 밑에 당나라의 침략을 저지하며 자기들의 오랜 고장이었던 서요하의 상류 노합하, 시라물렌하 등의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종족을 보전하면서 살아왔다. 그 동안 거란인들은 한인·돌궐인 등으로부터 강한 타격을 받고 그들에게 예속되기도 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자기 세력을 수습하여 그들에게 타격을 주고 독립을 회복하는 등 여러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강화되어 갔다.
9세기 말엽 이래 거란인들은 종래의 사냥·물고기 잡이·유목 등을 주로 하던 생활 풍습에서 벗어나 점차 각 지방들에 정착하여 농경과 목축, 그리고 금속제련술을 발전시키면서 급속히 강화되어 갔다. 거란인들은 점차 여러 부족들로 갈라서 살게 되었는데 이 부족이란 같은 혈통을 가진 씨족의 집단들과 그렇지 않은 많은 부락집단들로 구성된 큰 집합체였다. 평상시의 생활과 생산활동은 부족단위로 하였지만 전쟁은 전체 종족이 동원되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9세기 말경에 질라부(당시 거란 여러 부 가운데 하나)의 귀족 야율 아보기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어 901년에 군대와 전쟁에 관한 모든 지휘권을 차지하고, 906년 12월에 대거란의 황제가 되었다. 그 후 거란은 적극적인 대외침략을 통하여 영토를 엄청나게 늘렸을 뿐 아니라 대대적인 약탈로 하여 인구와 군대수가 불어났다. 이러한 거란족의 급격한 팽창은 당시 그 주변 여러 나라들을 위협하게 되었다.
10세기 초에 거란이 급속히 강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 말기 극도로 부패무능해진 발해왕권은 이에 대하여 필요한 대책을 철저히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발해의 내부 형편을 알게 된 거란은 발해를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들어 갔다.
드디어 919년 2월 거란인들의 침략이 개시되어 가혹한 약탈을 감행한 후 많은 발해인들을 납치하여 갔다. 발해에 대한 거란인들의 본격적인 침략은 924년부터 계획되어 925년 12월에 발해원정 출발을 하였다. 거란인들을 주력으로 하고 이미 거란에게 정복된 실위, 해, 오고, 돌궐, 사태, 다황, 회홀, 그리고 토번 등 많은 종족들의 부대들도 포함된 거란 군대는 황제 아보기의 지휘 밑에 수도 황도(오늘의 열하성 임서현)를 출발하여 이해 윤 12월에는 상령(오늘의 공주령 부근)을 거쳐 그날밤으로 곧 침공하여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성은 옛날 부여국 이래의 오랜 성의 하나로서 발해 15부의 하나인 부여부가 있고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에서 거란의 수도로 통하는 국경지대의 요충지(오늘의 회덕부군)였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국가의 전성기에는 여기에 항상 큰 역량의 정예부대가 배치되어 거란의 침략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발해국가의 쇠퇴기에 지배계급의 부패무능으로 이 성의 방비가 매우 소홀한 상태였다. 모든 악조건하에서도 성안의 전체 장병들은 나라의 위기를 직감하고 이 고립된 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희생적으로 싸웠으나 현저한 역량상의 차이로 성은 포위된 지 3일 후(926년 1월)에 점령당하고 성안의 전체 장병들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적들의 부여성 점령은 발해국의 존속에 치명적인 타격으로서 부여성을 함락한 적의 대군은 계속 동쪽으로 몰아 부여성 함락 6일 후에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의 홀안성을 포위하였다. 성안에 남아 있던 군민들은 나라의 존망을 판가름하는 이 엄중한 순간에 수만의 적 정예부대가 쉴새 없이 들이대는 맹렬한 공격을 맞받아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발해 지배계급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3일 후에 발해왕 대인선 이하 300여 명의 신하들이 거란 황제 아보기의 행영(전선사령부)에 가서 정식으로 투항하였다. 아보기는 '동단국'을 만든 다음 이전 발해국왕 대인선과 그 왕비, 고위급 관료들을 데리고 자기나라로 돌아갔으며, 발해국왕을 위하여 황도의 서쪽 구역에 새로 성을 쌓고 왕궁을 건설하여 그 일가가 살게 하였다. 거란의 회유정책에 의한 발해 옛귀족 관료들의 투항은 주민들의 분노를 자아 내었고, 주민들의 투쟁도 적지 않게 일어났지만 통일적 지도 밑에서 전개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http://www.goodfriends.or.kr/kor/min/book12.htm

[유민 활동]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동쪽 거란국이란 의미의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그리고 거란 태조의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 동단국을 동평(東平 : 현재의 陽)으로 옮기면서 발해 유민들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은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주요한 것으로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西京鴨府)에서 일어난 대씨(大氏)의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뒤를 이어 등장한 열씨(烈氏)와 오씨(烏氏)의 정안국(定安國, ?∼980년대?)을 들 수 있다.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577

거란과 발해는 이미 924년부터 변방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http://ycode.com.ne.kr/subnote/009.html

925년 12월 거란(契丹)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태조)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 부여부(扶餘府)를 점령하고 다음해 수도 홀한성(忽汗城:東京城)을 공격하자 항복하고 말았다.

http://www.koreananews.com/2xx/20x/205/205ki.htm

926년 7월 거란은 강묵기와 소아고지 등을 투입 장령부 토벌을 한 뒤 이를 이어 회발성과 서경압록부까지 공격하며 대진국 유민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하여 장령부 대진국 독립투사들은 회발성에서 거란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항거는 막을 내린다.
http://www.koreananews.com/2xx/29x/293/293ki.htm

Emperor Yelü Abaoji underwent military campaigns to expand the territory of his empire, submitted the states of Fuyu 夫余 and Bohai 渤海 where he created the "Eastern Khitan" Dongdan 東丹國 state with his own son Yelü Bei 耶律倍 as ruler.
://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132_03587.htm 

http://www.chinaknowledge.de/History/Song/liao-event.html

http://www.chinaknowledge.de/History/Altera/northeast.html

This period is commonly referred to as the "Unified Shilla" period. However, since Palhae has been recognized as a full-fledged Korean state.

671 AD Shilla drives out Tang army stationed in old Paekche territory

676 AD Shilla defeats Tang near Mae-cho fortress, complete hegemony over much of the peninsula (present Yong-in)

681 AD King Shinmun of Shilla conducts major political purge to reaffirm royal authority

Following the collapse of Koguryo, Tang China resettled thousands of Koguryo prisoners in the southwest Manchurian city of Yingzhou, west of the Liao River near modern Chaoyang. Although the Liao River basin, the Liaodong peninsula and the vast northern territories once dominated by Koguryo were under Tang China's sphere of influence, the Chinese actually had very little governmental control over the quite mixed, very fluid, and frequently volatile frontier population living in the area. In 696 AD, Khitan nomads living in Yingzhou rebelled against local Chinese authority. Former Koguryo General Tae Cho-yong and a group led by the Malgal chief Kolsabiu took advantage of the confusion and seized the leadership of the insurrection. General Tae and his supporters, including many former members of Koguryo's aristocracy, fled to the northeast and settled in the town of Dongmoushan near modern Dunhua, Manchuria .

General Tae Cho-yong gradually strengthened his ruling power over the scattered semi-nomadic Malgal tribes in Manchuria and the northeast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Despite strong external military and diplomatic pressure from Tang China to prevent major alliances among the Manchurian nomads, Tae Cho-yong proclaimed himself king of the new independent state of Chin in 698 AD. Koguryo's former aristocracy held the ruling power, clearly believing their state represented a revival of Koguryo. Manchuria's Malgal nomads, who once lived under the rule of Koguryo, found it not out of the question to follow the leadership of one of its generals. In 698, Tang Empress Wu recognized the fait accompli and proclaimed Tae Cho-yong the Duke of Chin. Fifteen years later Emperor Xuanzong invested Tae Cho-yong as King of Parhae, ruler of the ancient lands of the Puyo kingdom.

The rise of powerful Tujue tribes in the region blocked all attempts by Tang China to suppress General Tae's new kingdom, which straddled a major crossroads for Turkic-Mongol, Khitan, and other steppe nomads. Although numerous Malgal tribes lived within the territory of Parhae, they never amounted to more than a small percentage of the elite ruling class and no Malgal ever rose above the rank of tribal chief. Parhae treated the majority of the Malgal as subject people and forced some into manual labor or slave status. Parhae's social class structure, sharply split along ethnic lines, prohibited the formation of indigenous alliances.

Without a first class military force in the region to control the population, Tang China based its early relations with Parhae on the old policy of pitting the nomads against themselves, a reasonable approach given the nature of Parhae's population. The policy proved only marginally successful however, and few nomadic tribes accepted Tang offers of prestigious titles and rank. Those tribes that did accept the offer broke their allegiance with Parhae and became border armies directed by Chinese commanders.

Parhae remained quite hostile to China for decades. Weakened by its internal social structure, Parhae found itself in a genuinely delicate position, but the young kingdom could still strike out if provoked. In 732, after King Mu uncovered a Chinese plot to assassinate him, Parhae conducted a naval raid against the busy Tang seaport of Dengzhou, located on the northern side of the Shandong peninsula. Silla and Tang China retaliated the following winter with a combined assault against Parhae from the west and south. Incapable of withstanding such a massive two-front attack, Parhae reached outward for help. King Mu established formal diplomatic ties with the Tujue tribes of Inner Mongolia. He even sent his emissaries south across the East Sea to establish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Japanese. Parhae's greatest ally however, proved to be the harsh Asian winter weather. Deep snow drifts made the northern mountain roads and trails impassable. Unable to cross the high mountain passes, Silla's forces never reached Parhae to join the battle. Trapped by icy blizzards far from the warmer plains of the Naktong River, over half the Silla army died from exposure in terrain where temperatures plummeted to -45 degrees.

Parhae's King Son (818-830) ruled a vast territory that stretched north to the Amur River, east into the Russian Maritime Territory, west to the south-central plains of Manchuria, and southward down the Korean peninsula to the Silla frontier. Parhae established four regional capitals and five major roads pushed out through the provinces for trade and communications. The Parhae capital in the Amur region modeled itself after the Tang capital at Changan and King Son's government administration became a replica of the Chinese system. One official Chinese history noted the impressive cultural developments in Parhae early in the ninth century by describing the kingdom as a "flourishing land of the East."

Just as Korea reached its formative stage during the sixth and seventh centuries, filled with potential and poised to embark on new paths of independent thought and achievement, it felt the ponderous weight of Chinese civilization laid over it like a blanket. Having yet to evolve ideas of its own and knowing nothing better, the Korean people accepted the Chinese role model and started down the long path to an almost slavish acceptance of Chinese thought. From that time onward, Korea's sense of cultural spontaneity and originality dimmed. It slowly lost sight of everything beyond this artificially contracted horizon and imitation became its highest ambition.

Both Parhae and Silla established peaceful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Tang dynasty and began to assimilate Tang institutions and culture, a major factor in the later blossoming of their native cultures. International trade between China and Korea developed out of a paternalistic exchange of goods at the government level that operated something like an open acknowledgement of the balance of power. Through this "tribute system," the two Korean states recognized China as the paramount power, and their trade embassies paid ceremonial obeisance to both the Chinese court and its envoys to the two kingdoms. The ceremonial obligations which accompanied this "trading system" clearly reflected China's world view. In exchange for "tribute" paid to the imperial court, the Chinese benevolently rewarded the "inferior" state's envoys with "gifts." Any failure to observe this protocol could be taken by either party as a premeditated insult. While states peripheral to China adopted this system of trade and diplomacy in varying degrees, the Korean kingdoms adopted it rather completely.

Along with the official trade conducted by embassies, a great deal of private trade occurred among individual embassy members. Imports from Tang China to Parhae and Silla included robes and caps for court use, a variety of luxury textiles, tea, weapons, specialty items, curiosities such as parrots or other rare birds, and above all books. Both kingdoms imported large numbers of books and works of art from China. Religious monks and students traveled to China to study the tenets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he doctrines of the various Buddhist sects that proliferated under the Tang dynasty. Perhaps the most influential and familiar Buddhist sect in history appeared on the peninsula during the late Silla period. The sect was called Chan in Chinese and Son in Korean, but it is perhaps most familiar to the western world by its Japanese name, Zen.

The aristocracy in both Parhae and Silla developed a tremendous appetite for high quality goods. This demand and the growing volume of Chinese trade stimulated rapid developments in manufacturing. The central Silla government established individual offices for the controlled production of a wide variety of goods including high-quality textiles, furs, hides, furniture, pottery and roof tiles, clothing, lacquerware, paintings, horse and chariot equipment, tents and banners, weapons and ships. Silla exports to China included finely crafted weapons decorated with gold and silver and elaborately engraved with hunting falcons and hawks, gold and silver arrowheads and arrow cases, and silver needle cases with decorative engravings.

http://koreanhistoryproject.org/Ket/C03/E0304.htm

  • 698 AD Establishment of Jin-kuk (Palhae) by Tae Jo-yong

The remnants of the Koguryeo people, together with the Mohe tribes, established the Parhae dynasty (689-926) in Manchuria. The founder of Parhae (Bohai) was a former Koguryeo general, Tae Cho-young (r.689-719). Upon the fall of Koguryeo, he had been taken prisoner and forced to settle at Ying-zhou (modern Chao-yang), but seizing upon the occasion of an insurrection by the Qidan people, he led a band of followers eastward and proclaimed himself king of Chin, renamed Parhae, in 713. The Tae clan and Cho-young himself seem to belong to the core Koguryeo royal clan, Kye-ru, or to a naturalized Mohe clan.6

  • 705 AD Normalization of Tang-Palhae relations: Tang recognition of Palhae existence

  • 721 AD Shilla builds a long wall on Palhae border

  • 731 AD Successful Palhae occupation of Dengzhou, Shandong

In 732, King Mu (719-737) of Parhae sent an army by sea to attack the port of Deng-zhou on the Shan-dong peninsula. Silla and Tang joined hands in 733 to strike at Parhae in concert from two sides. The advent of the Parhae kingdom and the Unified Silla dashed the Tangs dream of conquering Manchuria and the Korean peninsula.

When the Parhae envoy arrived at the Yamato court for the first time in 727, they apparently claimed that Parhae was old Koguryeo, stating that it recovered Koguryeos old territory and was maintaining the Puyeo customs. The Parhae sovereigns message to the Yamato Kingdom in 798 states that the King may dare say that Parhae has been faithfully following the Koguryeo (or the footsteps of the Ko lineage).
7

Bohai's aggressive expansion triggered frictions between various entities including the Tang, the Khitans, the Xi, Gokturk, Silla and several Mohe tribes. When the Heisui (Black-Water) Mohe in the north of Bohai came under the direct control of the Tang in 727, Da Wuyi attacked the Heisui Mohe fearing a pincer attack. His pro-Tang brother Da Menyi opposed the military campaign and defected to the Tang. In 732 Da Wuyi made Zhang Wenxiu(張文休/장문휴) raid Shandong (山東省 蓬莱) (in Dengzhou 登州/등주) with the navy (called "pirates" in Chinese documents). The Tang ordered Da Menyi to make a counterattack and Silla to attack from the south.

To avoid international isolation, Da Wuyi began to dispatch embassies to Japan in 729. Japan welcomed them as a revival of what it considered to be the tributary Goguryeo, although Bohai assumed by mistake that Bohai and Japan were equal under the Tang's suzerainty.

In 735 the Tang accepted Da Wuyi's apology to incorporate Bohai into its anti-Gokturk alliance. Bohai enthusiastically introduced Tang's culture again although the tension with Silla remained high.

The second king Da Wuyi (Wuwang), who felt encircled by Tang, Silla and Black Water Mohe along the Amur River, attacked Tang and his navy briefly occupied a port on the Shandong Peninsula in 732. Later, a compromise was forged between Tang and Bohai, which resumed tributary mission to Tang. He also sent a mission to Japan in 728 to threaten Silla from the rear. Bohai kept diplomatic and commercial contacts with Japan until the end of the kingdom. Because of its proximity to many powerful states, Bohai became a buffer zone for the region.

  • 733 AD Shilla-Tang invasion of Palhae. Not successful

In 733 Silla and the Tang allied against Parhae, which sought ties with the Tujue to the north and with Japan. Parhae managed to spread into northeastern Manchuria under King Mu (r. 71937) and continued to expand into the mid-9th century.

  • 751AD Construction of Pulguk-sa temple and Skkuram grotto

The third king Da Jinmao (Wen Wang) expanded its territory into the Amur valley in the north and the Liaodong Peninsula in the west. He also established the permanent capital near Lake Jingpo in the south of today's Heilongjiang province around 755.

Parhae took advantage of the An Lu-shan rebellion (755-757), and occupied the Liao-dong area and absorbed Lesser Koguryeo.9 A map of Tang shows the coastal region of Liao-xi to the west of the Liao River having been included in Tangs territory as of 742, but another map of Tang provinces shows its borders as having been pushed behind the Great Wall by 763.10 Ledyard (1983: 341) quotes the Old History of Tang (Geography 2): Tangs An-dong Military Command, with its headquarters in Liao-dong after 676, lasted only eighty years before its abolition in 756.

In 717, the Tang had established the position of Ping-lü military governor 平盧軍使 at Ying-zhou, and in 765 let the Ping-lü governor take care of the envoys from Silla and Parhae (see Kim, 2004, p. 385-6). Manzhou Yuanliu Gao provides records which show that the Parhae had occupied the Bi-sa Fortress at the southern tip of the Liao-dong Peninsula. The History of Liao records that the Parhae established provinces at the Shin-sung, Kae-mo Fortress, Paek-am Fortress, Liao-dong Fortress, and An-shi Fortress area in Liao-dong, as well as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Liao-xi area. 11 The Parhae sovereigns message to Yamato Kingdom in 796 states that it has recovered the entire old Koguryeo territory and its rulers authority now shines beyond the Liao River.12 The Parhae came to occupy almost the whole of Manchuria, including the Song-hua and Ussuri basins as well as the whole adjoining coastal zone along the East Sea.

According to the Lie-zhuan section of the New History of Tang, the Middle Capital of Parhae, called Xian-de-fu, had six zhou including Xian-zhou, Tie-zhou and Tang-zhou.13 According to the History of Liao, those six provinces including Xian-zhou were located around the Liao River, some in the east and some in the west. Apparently measuring the distances from an early Parhae border prior to the An Lu-shan rebellion (755-7), however, the geography section of the New History of Tang mentions a place named Xian-zhou that had been located deep in the Long White Mountains.14 On the basis of this record, Chinese and Japanese scholars locate the entire Xian-de-fu deep in the mountains, drawing the map of Tang territory that includes the whole Liao-dong area until the fall of Tang dynasty in 907.

  • 780 AD Kim Yangsang murders King Hyegong and usurps throne as King Sungdok; marks beginning of many palace feuds to follow

  • 818 AD-830 AD Reign of King Sun (Da Renxiu/Dae In-su (大仁秀 Dà Rénxìu) or King Xuan (宣王))  of Palhae; height of Palhae power

He restored national strength. He was a 4th-generation descendant of Da Zuorong's brother. In spite of the collateral root, he succeeded to the throne around 817 and 818.  He recaptured royal authority and took a number of military operations northward against Mohe tribes and southward against Silla.

During his 12 year reign, he dispatched embassies five times to Japan, which aimed at trade in the name of laying tribute. Bohai's articles won favorable recognition in Japan although she tried to restrict the dispatchment due to the excessive burden of reception. The Japan-Bohai line across the Sea of Japan became one of important routes toward Tang for Japan.

  •  828 AD Chang Bogo establishes Chonghae fortress (present Wando)

  • 835 AD Major palace coup; Kim Kyun-jong becomes king in one of the bloodiest palace coup in history. He is in turn killed by nephew Chae-yung, who becomes King Hung-dok

  • 846AD Dismantling of Chonghae fortress; Chang Bogo assassinated

  • 892 AD Establishment of Later Paekche (Hu-Paekche) by Kyon-hwon

  • 901 AD Establishment of Later Koguryo (Taebong-guk) by Kung-ye

  • 918 AD Establishment of Koryo by Wang-kon

  • 935 AD End of Shilla

Parhae was conquered (926) by the Khitan, the Mongolian people who were soon to establish their own state, the Liao dynasty. Parhae was the last state of Korean origin to control Manchuria.

When the Qidan Liao conquered the Parhae, the Black-Water Mohe tribes that became incorporated into the Liao were called Tamed Ruzhen, and the rest of the Black-Water Mohe tribes that were not incorporated into the Liao were called Wild Ruzhen. The Wild Ruzhen inhabited the so-called White Mountain, Black Water area (i.e., the area around the Long White Mountains and Amur River).

After conquering the Bohai Kingdom in 926, the Khitan crown prince Yelü Bei ascended the throne of Dongdan at the old Bohai capital of Huhan in Eastern Manchuria, today's Mudanjiang, Heilongjiang Province. However, political tension soon evolved between Yelü Bai and his younger brother Yelü Duguang, who take the imperial throne of Khitan afer their father Yelü Abaoji died en route to his homeland from the successful campaign. The new emperor ordered his elder brother to move his capital from Huhan in Eastern Manchuria to Liaoyang in Western Manchuria. Bei obeyed the imperial order but soon fled to North China to avoid possible assassination in 930. Bei's son was elevated to the new king of Dongdan, but the kingdom was annexed by the Khitan Empire in 936.

To inherit Bohai's friendly relations with Japan, Dangdan sent a diplomatic mission over the Sea of Japan in 929. But the Japanese court in Kyoto rejected the mission from Dongdan Kingdom {(A.D.926~936) is the puppet kingdom established by the Khitan to rule the realm of the Bohai Kingdom in Eastern Manchuria}.

After the fall of Koguryeo in 668, the Ye-maek Tungus of central Manchuria began to be squeezed by the Xianbei wolves in the west and the Ruzhen tigers in the east down into the Korean peninsula to join their cousins who had decided a long time ago to make their living by cultivating rice. The appearance of the Parhae kingdom (689-926), however, represents yet another union of the Ye-mack Tungus and the Mohe-Ruzhen Tungus that lasted for more than two centuries. The leadership element of Parhae could have been drawn from the Mohe-Ruzhen people, but they after all had been part of Koguryeo. The Parhae state was based upon the foundations welded together by Koguryeo (see Henthorn, 1971, p. 54).

The first half of the union was apparently dominated by the Ye-mack Tungus, but the second half of the union seems to have been dominated by the Mohe-Ruzhen Tungus. With the appearance of the Mohe-Ruzhen Jin and Qing empires, the pure-blooded Ye-mack Tungus came to be confined to the Korean peninsula, and their cousins who stayed behind in Manchuria came to be thoroughly assimilated into the so-called Manchu people. Their assimilation might remind one of the Viking kingdoms. The Danish-dominated Viking empire (1397-1523) was dissolved by the Swedish rebellion, and Denmark lost southern Sweden around Lund in 1658. By 1814 there appeared the Swedish-dominated Scandinavia, in the form of the Suedo-Norwegian union under the Swedish king (that lasted until 1905), confining the pure-blooded Danish Vikings to the Jutland peninsula and the two islands.

渤海史主要年表

  • 668年 高句麗滅亡、遺民は満州の営州に強制連行される。
  • 671年 新羅戦争始まる
  • 697年 契丹・李尽忠の乱。旧高句麗人集団、営州から東走。
  • 697年 唐、安東都護府を廃止
  • 698年 大祚栄、辰国建国
  • 705年 唐、侍御史を辰国に派遣。安東都督府復活
  • 713年 唐、大祚栄に渤海郡王を贈る
  • 719年 大祚栄卒す。大武芸即位。
  • 726年 大武芸の弟・大門芸、唐に亡命

Publié dans Alliances

Pour être informé des derniers articles, inscrivez vous :

Commenter cet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