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th Movement : 제 4차 출전

Publié le par Tiger LEE

제 4차 출전
7월 13일 제 3차 출전에서 귀영한 함대는 즉시 제 4차 출전을 위해 폭약 등의 군수품 조달에 돌입하였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는 뜻이 잘 맞아 앞으로의 전망 등에 대해 많은 의논을 하였다. 이 때 선조는 왜적이 평양으로 진군하자 또 다시 도망하여 의주까지 가 있으면서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왜선의 본진인 부산 공략을 이억기와 의논하였다. 이억기는 흔쾌히 동의하고 원균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단 80척의 함선으로 500척이 넘는 적을 상대하겠다는 죽음을 불사한 결의였던 것이다. 이억기는 바로 전라우수영으로 돌아가 출동 준비를 마치고 8월 1일까지 좌수영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조하면서 우수영에 대한 지휘권도 이순신에게 맡기고 명령에 따를 것임을 다짐했다.

이억기의 함대는 8월 1일 좌수영에 도착해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이억기의 전함 40척과 협선 52척이 이순신의 전함 34척과 협선 40척과 연합하여 전함 74척과 협선 92척의 전란이후 최대의 연합함대를 편성한 것이다. 이순신은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23일간 합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부산 침투를 염두에 둔 훈련이었지만 병사들은 그 의미를 몰랐다.

8월 24일 오후 4시, 드디어 연합 함대는 여수에서 출항하였다. 관음포에서 1박을 한 후 노량을 통과하여 8월 25일 원균의 함대 7척과 합류하였다. 다시 당포에서 1박한 후 8월 26일 밤에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8월 28일에는 낙동강 일대를 수색하고 8월 29일 장림포에서 적선 6척을 격침했다. 9월 1일 새벽 2시 장항포를 출항한 함대는 오전 8시에 적선 5척을 격침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적선 8척을 다대포에서 격침하고, 오전 10시에는 적선 9척을 서평포에서 격침했다. 이어 오후 2시에 적의 척후선 2척을 송도 앞에서 격침하고 이어 3시 30분경 요격선 4척을 초량목에서 격침하는 등 연전연승을 계속하며 부산진으로 진출하였다. 9월 1일 오후 3시 30분경 초량목을 통과한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멀리 부산진에 무려 470척의 일본 함대가 밀집하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조선에 침입한 모든 일본 함선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함대는 80여 척이었으므로 무려 6배에 달하는 것으로 6대 1의 싸움이라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도망을 친다면 사기가 오른 왜선이 맹렬히 추격해올 것이므로 이순신의 함대는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왜선들은 공포의 이순신 함대의 돌격에 겁에 질려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돌격해 들어가자 이억기의 함대로 뒤를 따랐고, 원균도 엉거주춤하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부산진의 왜선 470척 중에는 이미 함대를 이순신에게 잃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

키, 구키 요시타카 등도 섞여 있었다. 이미 이순신의 신화는 왜군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어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왜선들을 에워싸고 있는 지상에 축성된 왜성과 포대 진지였다. 조선의 육군에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의 대포로 무장한 포대 진지는 이순신의 함대가 사정권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이순신의 함대가 포대 진지의 사정권에 들어가자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포수는 바로 왜병들에게 포로가 된 조선인들이었다. 아직 조선식 대포를 다룰 줄 몰랐던 왜병들의 입장에서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포탄이 떨어지기만 했지 좀처럼 우리 함대를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아마도 조선인 포수들이 고의로 조준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왜병들이 조선인 포수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어 육상의 포대에서 모과 열매만한 수마석괴(水磨石塊:돌을 둥글게 깎아 만든 포탄)들이 무수히 날아와 함선에 명중해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대포에 의해 조선인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물러서지 말고 돌진하라! 지상포를 두려워 말라! 눈앞의 적선을 격멸하는데 정신을 집중하라! 우리가 적선에 바짝 접근하면 적들도 포를 쏠 수 없게 된다!”고 외치며 진격을 독려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 속으로 뛰어든 이순신과 그의 24척의 특공함대는 결사적으로 포를 발사하며 적선들을 파괴해 갔다. 7만 명의 왜병들은 그들의 조총 사정거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전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억기의 함대도 곧 이 결사전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적선을 향해 포를 발사하였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결사전은 약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오후 7시경, 부산 앞바다는 온통 불타는 왜선으로 뒤덮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모든 기동함대의 대포들은 연속된 포격으로 인한 포열(砲熱)로 인해 더 이상의 사격이 불가능하였고, 포탄도 거의 다 떨어져 그야말로 유감없는 일전을 벌이고 퇴각하게 되었다.

연합함대의 기함인 이순신의 중군선으로부터 주목을 요하는 나팔이 울리고, 공격 중지와 퇴각을 명하는 깃발이 올랐다. 미친 듯이 울려대던 포성이 일시에 멈추고, 연합함대는 질서 정연하게 전장을 빠져 나갔다.
불과 3시간에 걸친 이 결사 해전으로 일본은 군함 100여척과 적어도 3800명의 수군을 잃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함대도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한 6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부상자도 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전함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 해군은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임진년 5월 4일, 제 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쳐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여 적선의 격침, 나포가 207척이었고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한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3,780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상, 전사자를 모두 합하여 243명에 그쳤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의 어떤 전쟁에서도 특히 해전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었다. 적선 격침 및 대파 359대 0, 사상자 33,780 대 243.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 이순신의 이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전황(戰況)
이순신 함대의 빛나는 승리는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수륙 연합 작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4월 14일 새벽에 부산에 상륙 후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서울 함락 3일 전에 도망친 조선 왕을 쫓지 않고 무려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무르며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일본군은 오히려 육군이 고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모든 지원을 육군에 집중시켰고, 서울 점령 때쯤이면 해군이 보급품을 싣고 수로를 이용하여 편안하게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므로 한강에서 재보급을 받고 평양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다음의 보급 지점을 평양으로, 3차 보급 지점을 신의주로 하여 각각 대동강과 압록강을 이용한 보급으로 설정하여 육군의 돌격적인 진군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육군은 속전속결을 위해 가벼운 장비만으로 서울 점령에 온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고니시 군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급품이 바닥난 상태에 있었다. 고니시는 재보급을 받기 위해 해군 수송 선단을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해군의 최강이라 예상하던 경상 우수군을 일거에 격파한 일본 보급 선단과 호위 함대들은 느긋하게 한려수도를 돌아 한강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이순신의 함대에 5월 7일 옥포에서 일격을 당해 4천의 일본군과 2천 톤 이상의 보급품이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일주일 후인 5월 15일 서울에 도착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도 전달되었다.

예상치 못한 보급 선단의 괴멸로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소용없어진 고니시는 할 수 없이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진격해 갔다. 평양성을 깨뜨리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한 고니시는 그 기간이면 초전의 실패를 극복하고 일본 해군이 조선 해군을 격멸하고 대동강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쳐 평양성엔 무혈입성하는 행운을 얻었다. 행운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버리면서 무려 10만석이 넘는 군량미를 고스란히 남겨놓고 가 일본군을 궁지에서 구해준 것이다. 이로서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고, 조선의 왕은 불과 3일 거리인 의주에 있다는 정보도 이미 입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탄약 부족이었다. 만약 그들의 속사정이 조선군에게 알려지면 그들은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모두 애타는 마음으로 보급 선단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그렇게 기다리던 72척의 일본 대선단이 또 다시 이순신에게 걸려 남해안도 통과하지 못하고 당포 등지에서 모조리 괴멸되고 만 것이다. 이로서 고니시는 평양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불과 3일 거리의 조선 왕도 추격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를 불안해하며 대동강만 쳐다보던 고니시에게 더욱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 해군 제독 이순신을 잡기 위해 무려 6만의 병력과 함대가 투입되었는데 이들이 불과 이틀만에 한산도, 안골포 해전 등에서 모두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 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라 좌수군인 이순신 함대에게 서해 보급로가 봉쇄당한데 비해, 동해쪽은 경상 좌.우 수군이 모두 초전에 무너져 무방비 상태였던 까닭에 보급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가토 군은 7월에 벌써 회령까지 진격하여 그 곳에 도망쳐 와 있던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는 쾌거를 이루었다. 순조로운 보급이 작전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Sources :

http://www.damool.net/html/special/leesoonsin6.htm

http://www.damool.net/html/special/leesoonsin7.htm

Publié dans Imjin Wae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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