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cheon Waesung/ Wajo

Publié le par Tiger LEE

Geomdan-sanseong Fortress was an old battlefield stationed by commanders from the allied forces of the Joseon and Ming dynasties during the Jeongyu-jaeran war where offensive and defensive battles with Konishi Yukinaga from a Japanese castle, which was 2.7 km away, took place for 2 months from September, 1598.

검단산성은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산 48번지로 여수시와 순천시를 잇는 길목에 자리한 산성으로 지역 주민들은 안산 또는 검단산이라고 부르며 지도에는 피봉산으로 나와 있는 해발 138.4m의 낮은 산 7∼9부 능선에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눈앞에 광양만과 순천만을 포함한 주변이 훤히 바라보이는 요새지이다. 순천 왜성과는 2.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순천시에서 순천 왜성으로 가는 찻길에서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산성에 이른다. 
이 산성은 일반적으로 조선산성 또는 한성으로 기록되어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이 신성리의 왜교성에 있던 왜군과 대치하면서 쌓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순천대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와 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뜻밖에 백제시대에(600년경) 돌로 쌓은 성으로 밝혀졌다. 성안의 시설물로는 문터 3개소, 건물터 3개소, 큰 우물터 1개소, 저장구덩 2개소와 백제시대의 기와, 질그릇, 쇠도끼, 창, 나무삽, 나무바가지, 석환 등 다양한 유물들이 나왔는데 산성의 성격과 생활 모습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체로 성의 크기는 둘레 약430m, 바깥성벽 1∼3m(추정높이 약4∼6m), 안쪽성벽 2m이상, 성벽두께 5m정도다. 산성을 쌓은 모습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이다.
자료의 추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곳은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곳으로 1598년(정유재란) 9월부터 2개월간 동쪽 왜성의 소서행장과 치열한 공방전을 치룬 임란전적지이다.

순천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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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49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로 격하된 왜성은 면적이 188,428㎡이고 이름은 왜교성, 왜성, 왜성대, 왜교, 예교(曳橋), 예교성, 망해대(望海臺), 신성리성, 순천성 등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순천에서 여수 쪽으로 6㎞ 정도 가다가 검단산성 끼고 왼쪽으로 6㎞ 더 가면 신성리 마을이 나오는데, 남쪽으로 200m 지점에 광양만을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나지막한 소나무숲산이 보이는데 이곳에 순천 왜성이 자리한다.   직접 올라 보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에 위치했음을 금방 알 수 있는 성은, 외성 길이 2,502m, 내성 길이 1,342m로 외곽성(토·석성) 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되어 전형적인 일본 성곽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지금도 끊긴 데가 거의 없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성을 쌓은 돌의 크기는 1.5∼2m이고 내성높이 4m, 외성높이 5m, 둘레길이 약 3,000m이다. 양국 성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조선식 성이 평지성이나 산성이 일반적인데 비해 왜성은 두 가지를 합한 평산성이다. 또한 왜성은 반드시 배를 댈 수 있는 해안가의 얕은 산 위에 만들었다. 조선식 성곽이 한겹이고 수직이라면, 왜성은 지휘대를 중심으로 3중의 동심원형으로 70도 정도 경사져 있다.
  또 조선식은 많은 돌로 기초공사 없이 큰 자연석을 포개 올리고 그 사이를 작은 돌로 메워 성벽을 고정했다. 성벽 또한 조선식은 보통 30cm로 얇은데, 왜성은 ㄱ자형의 돌담 사이를 통과해 들어가도 10∼20m 앞에 또 다른 돌담이 있어 침입자를 활 또는 조총으로 격퇴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조선식은 총지휘소를 두는 데 일정한 원칙이 없지만, 왜성은 성안 가장 높은 자리에 보통 3층짜리 건물로 총지휘소로 삼았다. 한 일화는 순천에 부사로 왔던 이수광은 우리땅에 왜군이 쌓은 성이 있는 것이 부끄러운 역사라며 "미친 왜놈들이 성을 만들어 두루 좋은 지형을 차지하고 있다. 산하는 전부터 부끄러운 땅이 되었고 풀과 나무는 피비린내가 난다." 는 한시를 남겼으며, 이름을 망해대로 고쳐부르기도 하였다.
  하여간 순천왜성은 1597년 9월 2일에 쌓기 시작하여 12월 2일에 완성하였다. 당시 9겹으로 성벽을 쌓았으나, 지금은 지휘부가 있었던 곳에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일부와 산마루에 큼직한 자연석을 쌓아 만든 높직한 사령대와 남아 있을 뿐이다. 또 왜교 또는 예교란 명칭이 붙었듯이 처음 만들때부터 조·명 연합군이 주둔한 검단산성쪽을 파 도랑을 내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의 역할을 통해 방어를 굳게 하려고 했으며 출입하기 편리하게 연결다리를 설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이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왜군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크게 패하고 일본으로 물러나기 전 약 1년 동안 수비거점으로 삼과 귀국 명령을 기다리면서 성을 쌓았다. 왜냐면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패했지만 즉시 본토로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즉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서생포, 임랑포, 기장, 부산포, 구포, 가덕포, 장문포, 안골포, 웅천)에 20여개의 성을 쌓고 군사를 남겨두고 조·명 연합군과 협상을 핑계로 보상을 받고자 하였다.  당시 이곳은 울산, 사천 왜성과 함께 왜군에게는 중요한 장소였다. 특히 1598년 9월에서 11월 19일까지 노량해전 있었던 날까지 2개 월 동안에 바로 앞의 장도와 광양만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공방전이 펼쳐진,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이며, 격전지였다.
  귀국명령을 기다리던 소서행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에 철수를 준비했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철수길을 막아 어려움에 처한다. 여기에 충무공은 1598년 9월 20일 처음으로 이곳 왜성을 공격하였으며 다음달 10일에 다시 공격하였다.

그러나 명군과 협공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아 쉽게 왜군을 몰아내지는 못하였다. 11월 3일에는 왜성 앞 장도에 충무공이 진을 치고 있는데, 일본에서 왜군의 철수를 돕기 위해 보낸 구원군이 배 300여척을 거느리고 노량바다에 나타났다. 충무공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고, 그사이 왜성의 왜군은 후퇴하였고 7년간의 왜란은 끝났다.

순천시는 예로부터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기름져 살기 좋은 곳이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1597년) 당시 왜군 선봉장 우끼다 히데
이에와 도오 다까도라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이다.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끈 1만 4천여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연합군과 두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왜성
유일하게 한곳만 남아 99년 2월 지방기념물 제 171호로 지정되었다.
순천왜성은 수륙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36,480평, 외성2,502m,내성
1,342m로 외곽성(토석성) 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조.명 연합군이 축조한 검단산성 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다리가 물에 뜨게 하여 예교
(曳橋), 왜교성(倭橋城)이라 하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임진란 패인이 전라남도 의병과 수군의 용전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키 위해 풍신수길의 야심에 따라 전라도
각처에 진을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무술년(1598년) 8월
그가 급사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참략 최정예 부대인 소서행장
왜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친 최후 최대의 격전을
펼친 곳이다.
순천시가지에서 여수쪽으로 6km 쯤 가다가 왼쪽으로 6km를 가면
200여호가 사는 신성리 마을과 이충무공을 배향한 충무사가 있고
남쪽 200m 지점 광양만에 접한 나즈막한 송림에 위치한 왜성
유정.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 6천, 진린,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1만 5천 병력이 왜성을 비롯 노루섬, 장도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멸했고 이충무공이 27일간을 머물면서 전사 하루 전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둔 유서깊은 전적지이다.

順天倭城

 
 
 
소 재 지 :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일대
축성시기 : 1597년 9월~11월말(약3개월간)
지방기념물 : 제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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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9월 대판성(大板城)에서 열린 강화교섭 결렬로 풍신수실(豊臣秀吉)은 2차 조선침략에 착수하게 된다.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 선봉장 우희다수가와 승당고호가 호남을 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4천여명의 왜병이 주둔 하여 조.명연합군과 두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호남지역에는 유일하게 한곳만 남아 있다.

순천왜성은 수륙요충지로서 성곽규모가 36,480평, 외성 2,502m, 내성 1,342m로 외곽성(토석성)3개,본성(석성)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조.명 연합군이 축조한 검단산성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垓字)처럼 만들고 연결다리가 물에 뜨게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하며 일본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정유재란(慶長役) 초에 일본군에 의하여 축성된 왜성은 왜교성(순천왜성),남해성,사천성,고성성,창원성,양산성,울산성 등 7개 왜성으로 왜교성을 제외한 나머지 왜성이 모두 경상도 연해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내륙지방에 침략군의 교두보가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본국에서부터 가까운 지역,즉 병참보급선이 원활한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시켰다가 다시 북상의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성의 축성은 대체로 독립된 구릉의 정상부나 바닷가를 택하여 山頂을 평탄하게 하고 그 사면을 급하게 깎아내려 올라가지 못하게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패인이 전라도의병과 수군의 용전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키 위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에 따라 전라도 각처에 진지를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무술년(1598연)8월 그가 급사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침략 최정예 부대인 소서행장 왜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친 최후.최대의 격전을 펼친곳이다.
노량해전은 순천왜성 전투의 최종단계에서 비롯된 1회전의 마지막 전투였고, 조˙명 연합수군이 대첩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명장 이순신 장군은 왼쪽 가슴에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현재 순천왜성(順天倭城)은 본환에 해당하는 부분인 천수각과 2지환,3지환은 복원을 한 상태이며, 외성(外城)에 해당하는 부분은 도시의 개발과 사유지로 인하여 복원을 하지 못한 상태이다. 외성(外城)에 해당하는 부분은 과수원과 임야,폐경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관광 :
순천왜성, 낙안읍성, 고인돌공원, 송광사,선암사,천자암 쌍향수,진남관,오동도, 돌산대교,검문도,향일암,흥국사,화정면 사도,


http://www.proudi.com/travi/data/SightGuide/38/06_38_3125.html

Sources:

http://www.natsukusa.com/soonchun.htm#

http://www.jeonlado.com/v2/ch02.html?&number=6233

http://sarangbang.com/entertainment/travel/travel.html?db=&fields=&findword=&no=1007782839&page=49

http://www.dk21.com/news/show_life.jsp?BA=dk_newstong&BI=life&BN=0004a <

Publié dans Imjin Wae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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