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상 전 투

Publié le par Tiger LEE

여수와 임진왜란

I. 여수와 임진왜란

여수지방의 역사는 아주 옛날 삼국시대부터 밝혀지고 있으나, 여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생긴것은 고려가 건국해서 전국의 지명을 바꿀때 부터였다. 그러나 여수지방은 경지면적이 협소하고 인구가 희소하여 삼국시대부터 순천의 속현으로 내려왔는데 여수현령이 처음으로 임명된 것은 고려말 충정왕 2년(l350)이었다.

그러나 이 억수현령시대도 겨우 43년간 계속되다가 이성계가 건국 한 후에는 반역향이라하여 억수현마저 폐현되고, 순천의 일개 여수 면으로 전락하여 이조 500년동안 내내 순천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성계 때에 반역향이 된 연유는 고려말 최후의 여수현령이었던 오흔인현령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하여 성의 문을 굳게 닫고 이성계의 사자를 받아들 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떻게 되어 여수는 역사상 독립된 현령이 다스린 시기는 고려말의 43년에 불과하고 모든 시대를 순천의 속현 또는 면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처럼 여수지방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내왔으나, 왜구침략에 가장 노출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가 침략하기 시작한 여말선초부터 수군기지로서 점점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니 진례만호와 내례만호를 거쳐 성종 l0년(l479)에는 드디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l895) 혁파되기까지 장장 4l7년 동안이나 남해안 방어의 주진으로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다해왔던것이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경상도 수군이 모두 자멸하였으나, 여수의 전라좌수군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바다의 모든 왜적을 격파하므로서 충무공으로 하여금 구국의 성웅이 되게 하였고, 여수는 구국의 성지가 되었으니 여수로서는 이 보다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억수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임진해전을 도저히 빼놓을수 없고, 임진왜란을 이야기 할때 이 고장 전라좌수군의 위대한 승리를 빼 놓을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억수의 뿌리찾기 운동을 위한 이책자에서도<여수와 임진왜란>이라는 항목을 특별히 따로 만들어 이 고장 선조들의 자랑스럽던 행적을 찾아 보려고 한 것이다.

 

2. 충무공 여수에 오시다.

층무공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계시다가 제81대 전라좌수사의 교지를 받은 것은 선조 24년(l591) 음력 2월 l3일 이었고, 여수에 도착하신 것은 2월 28일 이었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l년 2개월전의 이른 봄이었고 공의 나이 47살 나던 장년기였다.

(참고)이순신을 제81대 수사로 보는 것은 필자의 사견인데 그 계산근거는 다음과 같다

전라좌수사의 명단은 이순신을 기준으로 하여 전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즉 이순신 이전 112년간(1479-l591)의 수사명단은 체계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여기저기 기록에서 8명만 찾을수 있고, 임진 왜란이후 305년간(1591-1895)의 수사명단은 224원이 모두 전해오고 있다 임란 후의 평균 수사 재임기간이 약 1. 4년이므로 임란이전의 112년을 l. 4년으로 나누면 80대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이순신을 제81대 전라좌수사로 가정하고 이를 기준 하척 모든 수사의 대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계산방법에 승복하지 않을 분들도 계시겠지만,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전라좌수사의 대수를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는 것이다.

현감이 종6품이요 수사가 정3품당상관이니 , 이순신의수사 임명은 무려 7품계나 뛰어오른 대승진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구나 충무공은 하급관리로 있을때부터 성격이 강직하여 불의에 굽힐 줄 몰랐으며 상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정의의 무관이였으므로 그 이름이 일찍부터 조정에 잘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공을 추천하고 뒤에서 보살핀 사람이 남인거두인 서애 유성룡이었으므로, 이미 당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당시의 조정에서는 북인들의 반대는 너무도 치열하였다.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와서 풍신수길의 눈을 쥐의 눈으로 보고 했던 김성일의 반대는 너무도 날카로워 대신들이 대죄하는 소동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충무공이 그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도 정유년에 백의종군하게 되는 데는 원균의 모함에도 있었으나 이처럼 북인들에게 수사발탁 때부터 미움을 받았던 이유가 더크게 작용하고 있는것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이민서같은 사람들이 공의 전사를 자살로 보는 이유도 충무공의 생애에 당쟁의 발톱이 너무도 깊이 상처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나오게된 추측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충무공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앞으로 설명할 그의 전공과 임진왜란을 착착 준비하고 있던 일본의 사정을 감안할때 너무도 다행스럽고 적절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유성룡은 충무공을 추천한 그 일 하나만으로도 국가에 대한 보답이 충분하 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당시의 조정은 임란에 대비하여 아무일도 하지않았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충무공 한사람만을 믿고 안무했던 상황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3. 전라좌수영의 전투준비

1)거북선 건조

거북선은 충무공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고 임진왜란의 상징처럼 보어 있는데 이런 거북선이 이 곳 여수에서 건조되었으니 , 거북선은 또한 여수의 대명사가 되어야하고 여수의 상징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임란 당시의 거북선이 언제 착공 건조되었으며 , 또 어느장소에서 건조되었고, 과연 몇척이나 되었으며 크기나 모양은 어떠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주위에는 거북선의 모형이나 그림이 범람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에는 다음과 같은이유가 있는 것이다. 충무공이 돌아가신지 약 200년 후인 정조 l9년(1795)에 정조대왕이 충무공을 흠모하여 공에게 영의정을 추중하고 또 공에 관한 모든 기록을 한데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였는데 이때 거북선에 관한 기록을 등재하면서 임란당시의 기록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정조대왕 당시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을 자세히 기록하고 그림까지 그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거북선에는 <임란당시의 거북선>과 <정조조의 거북선>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거북선의 크기나 모양이 같았는지 틀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사물의 발달이 급격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두 거북선 사이에는 200년의 간격이 있기는 하나 비슷하지 않겠는가 하고 추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주위에 범람하는 거북선의 모형이나 그림은 <임란당시의 거북선>이 아니고 모두가 <정조조의 거북선>인 것이다.

그러나 <임란당시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고장 선조들이 만든 거북선에 대한 설명을 요점만 간추려 기록해 보려고 한다.

[가] <임란당시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

난중일기의 기록(원문생략)

[임진년 2월 8일]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임진년 3월 27일] 일찍 조반을 먹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며,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것을 시험하였다.

[임진년 4월 11일] 비로소 베로 돛을 만들었다.

[임진년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그런데 이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이틀전이었으니 공의 준비와 임란은 마치 경주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포파왜병장중의 기록

그런데 신이 일찌기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고.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아 온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붙여 아가리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 는 밖을 내다 볼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비록 적선 수백척 속에서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었는데 이번 길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읍니다. (이 기록은 공이 제2차출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선조께 올린 전투보고서인데 거북선은 이때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 하였다)

이분의 행록에 나오는 기록

공이 수영에 있을때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을 알고 본영및 소속포구의 무기와 기계들을 모조리 보수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 한데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위에는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지나 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 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입은 총구멍이 되고 뒤는 거북의 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개의 총구멍이 있는데 대 개 그 모양이 거북 형상과 같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

뒷날 전쟁 할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배에 올라와 덤비여 들다가는칼날과 송곳에 찔려서 죽으며, 또 에워 쌓고 거북선을 엄습하려다가는 좌우 앞뒤 에서 한꺼번에 총을 쏘니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적을 격파했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 거북선 때문에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이분은 충무공의 큰 형 희신의 세째 아들로 임란 때에는 성천으로 피난하였으나, 정유년에는 충무공을 종군하여 여러가지 군사사무를 보았다.)

[나]. <정조조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

통제영구선지제

정조조당시의 통제영 거북선에 관한 기록인데 저판, 좌우현판, 노판, 축판, 좌우현난관, 개판,구두, 노와 포구 그리고 내부시설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생략하거니와 이 기록옆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의 모형은 <제1도>와 같다.




[정조조 통제영구선도]

 

전라좌수영구선지제

정조조당시의 전라좌수영의 구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고 그림도 그려놓았는데(제2도)와 같다.


[정조조 전라좌수영구선도]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치수와 같이 넓이 등은 통제영 거북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 머리 아래에 또 귀신머리를 새겼으며 복판위에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둘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대포 구멍이 두 개 현판 좌우에 대포 구멍 각각 한 개, 현판난간 좌우에 대포구멍이 각각 열개 복판좌우에 대포 구멍이 각각 여섯개씩이고 좌우 노는 여덟개씩이다.

이 정조조의 두 가지 거북선 기록을 기초로 하여 지난해(1980) 진해 해군공창에서 2억2천만을 들여 거북선을 복원하였는데 전장이 113척, 선체길이가 84척 , 선폭이 84척 , 전체높이 21척, 홀수가 4.5척 배수량 150톤, 속력 3노트(돛을 달았을 때는 5-7노트) 포14문 그리고 승조원 130명이었으며, 측면기본설계도는 <제3도>와 같다.



[측 면 도]

 

다음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거북선은 과연 몇 척이나 되었으며 어느 곳에서 건조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연구에참여하였으나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던 중, l979년 충무공유적지선소고중조사단의 보고서에 의하여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임란 당초에 건조한 거북선은 본영구선 및 방답구선 세 척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자기 소속의 해군기지인 전라좌수영선소, 순천선소 그리고 방답선소에서 건조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2) 철쇄방비시설

이 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통행을 막는 시설이었다. 우선 긴 쇠사슬의 중간 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구실을 하게 하고 이런 쇠 사슬을 바다에 가로 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수면밑으로 큰돌을 달아메어 닻의 구실을 하게 하는 방법 이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돌은 성생원에서 떠왔고, 나무는 두산도에서 베어 왔으며 공은 거의 날마다 이 쇠사슬 건너매는 일을 감독하고 있다. 이 외에도 북봉연대를 만들어 6관 5포와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좌수영성의 해자를 보수하며 6포의 방비상황을 점검하는등 전라좌수영에 온 이순신수사는 임란이 일어나기까지 1년 2개월간 전란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4. 진해루 군사회의

임진왜란을 7년전란(1592-1598) 이라고 하지만 7년간 내내 끊임없이 전투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첫해인 임진년(l592)과 전란이 끝나는 마지막 해인 정유.무술년(1597-1598)두 해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약 5년간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 6년간에는 실질적으로 전투가 없었던 것이다.

바다에서의 싸움인 해전도 마찬가지여서 임진해전과 정유해전으로 구분되는데, 전라좌수군이 혁혁한 전공을세우게 되는 해전은 임진해전이고, 이 해전의 승리가 또한 구국의 성전이 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임진해전을 조금 자세히 기록하고 나머지 강화교섭기간 중의 동태나 정유해전은 간략하게 다루려고 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소식을 들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날인 4월 l5일 오후8시경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그 내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4월14일) 오전 l0시에 도착한 가덕진첨사 전응린과 천성보만호황정의 보고에 의하면 응봉 봉수감고 서건이 전해오기를 <어제 (4월13일)오후 4시경에 왜선 90여척 정도가 오륙도를 지나 부산포로 향하여 잇달아 나옵니다>라고 하였기로 가덕진첨사 전응린 자신도 방략에 의거하여 대비하고, 또 다대포 우격격장으로 하여금 군선을 정비하여 바다로 나아가 대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만 내생각으로는 틀림없이 매년 오는 세견(무역선)인듯도 하나 90여척이나 많이 나온 이유를 알기 어렵고, 또한 계속 나온다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방비하고 망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이 주야로 대비하도록 경상우도의 각관포에 엄중히 명령하고 나도 군선을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어떻게 된 변인가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원균의 공문을 받은 여수의 이순신 수사는 이것이 왜적의 침략임을 즉각간파하고 전라좌수영관하 5관 5포에 즉각 비상을 걸고, 전라관찰사 이광 전라병사 최원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원균의 공문 내용을 신속히 연락하였다.

이순신수사의 판단은 적중하여 그후 원균의 공문이 4통이나 더 오고, 경상관찰사 김수와 경상우병사 김성일의 공문이 계속 날아들었는데, 4월 13일 5시경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왜적의 침략군은 다음날인 4월14일 새벽 6시에 상륙하여 부산진을 함락하고 4월16일에는 동래(송상현부사가 전사함)를 함락한 후 계속 북상하였다.

이 무렵 경상도수군의 활동상은 자세히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박홍의 경상좌수군이나 원균의 경상우수군은 전투 한 번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되어 버렸다. 이 때 경상도의 수군세력은 전라도의 수군세력보다 더 크고 강하였으므로 만일 이들이 자멸하지않고 합심하여 저항했더라면 침략군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침략의 예봉을 어느정도 저지시킬 수 있었을 터인데, 많은 전선과 수군을 보유 했던 경상수군이 싸움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자멸해 버린 것은 천추에 남는 한이 아닐 수 없다.

연달은 왜변의 급보를 받고 이순신수사는 전라좌수영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고 수군을 징발하는 등 숨가쁜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는데 4월 20일 드디어 경상관찰사 김수의 구원요청을 받게 된다. 당시의 군령계통으로는 경상감사가 전라좌수군에게 출동을 명할 수 없었으므로 김수는 조정에 장계로서 전라수군의 구원을 상신하고 그 내용을 미리 이순신수사에게 알려 온 것이다.

이와같은 김수의 원군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조정의 출동명령이 곧 내려올것을 예상하면서 출동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데 과연 4월 26일에는 이순신수사에게 출동유서가 하달되었다. 출동유서를 받은 이순신수사는 관하 5관6포의군선들을 4월29일까지 본영인 여수에 집결하도록 군령을 하달하였다.

4월 29일 예정대로 5관5포의 장수들이 여수에 도착하여 진해루(진남관터에 있었던 임란전의 전라좌수영지휘소)에 모여 작전회의에 들어갔으나 이 때 모인 장수 들은 다음과 같았다.

전라좌수사 이 순 신 광양현감 어 영 담
흥 양 현 감 배 흥 립 사도첨사 김    완
본 영 우 후 이 몽 구 낙안군수 신    호
방 답 첨 사 이 순 신 발포가장 나 대 용
순 천 대 장 유    섭 보성군수 김 득 광
여 도 권 관 김 인 영 녹도만호 정    운



진해루에 모인 여러장수들의 의견은 분분하였다

[본도수군은 본도를 지키는 것이 옳은 임무고, 영남으로 들어온 도적을 나아가 친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오직 군관 송희립이 [큰도적이 국경을 치고 들어와 그 행세가 커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될리 도 없으니 나아가 싸우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운이 꺾일 것이고, 또 불행히 전쟁에서 죽는다 해도 신하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고 말하자 녹도만호 정운도 [나라를 지키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있오 신하로서 평소 국은을 입고 국록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않고 어떻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이오]하니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현감 배흥립등 모두가 분격하며 제 한 몸을 잊어 버리고 경상도 출동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진해루넓은 대청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말없이 여러장수들의 주장을 듣고 있는 이순신수사는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상도의 자세한 전황이며, 조정의 형편 전라우도수군의 출발여부등 마음 놓을 곳이 하나도 없다 더구나 포악한 적의 소식을 듣고 벌벌떠는 수졸격군들의 의기조침한 모양이 더욱 걱정이 된다. 한참만에 눈을 뜬 이순신수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적의 기세가 마구 뻗쳐서 나라가 위급하게된 이때 어찌 다른 도의 장수라고 핑계하고서 물러나 제 경계만 지키고 있을 것이냐. 내가 시험삼아 물어본 것은 우선 여러장수들의 각오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가서 싸우다가 죽는 것 밖에 었다. 5월 초4일 새벽 출동을 결정하니 감히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목을 베리라]라고 선언하였다. 이래서 전라좌수군의 위대한 승리는 시작된 것이다.

Sources :

http://bora.dacom.co.kr/~winwin3/p2/batt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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